반제반전 투쟁과 평화 기원으로서의 아마겟돈 전쟁: 요한계시록의 주체 윤리

2017. 6. 19. 18:16조국통일








반제반전 투쟁과 평화 기원으로서의 아마겟돈 전쟁:
요한계시록의 주체 윤리* 1)
2)이 병 학 **

I. 서론적 성찰
오늘날 우리는 전쟁에 대한 불안과 인류를 멸절시킬 핵전쟁의 위협을
느끼면서 산다. 세계 도처에서 전쟁과 내전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으며,
한반도에는 사소한 군사적 충돌에도 한 순간에 전면적인 전쟁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초강대국들은 전쟁에 쓰이는 군사 무기를
생산하고, 제삼세계의 정부들은 무기를 구매하기 위해서 자국민의 복지를 희
생시키면서 막대한 돈을 소모하고 있다. 정당한 전쟁 이론가들과 기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전쟁을 신의 재가를 받은 불가피한 제도인 것처럼 간주한다.
세계의 상황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생태적 측면에서 점점 더 나
빠져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신약성서의 맨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에서 위안과 출구를 얻고자 한다. 기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우주적 일정의
마지막 단계로 간주하는 아마겟돈 전쟁과 세계의 종말을 향해서 달리는 열
차의 정거장들을 표시한 시간표를 요한계시록에서 찾으려 하고, 또 지금이
바로 종착역에 거의 도착한 때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요한계시록의 아마겟
돈 전쟁 환상이 오늘날 중동 지역에서 발생하는 어떤 전쟁, 혹은 조만간에
터질 핵전쟁에 대한 예언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구원받은 사람들만이 지구
가 파괴되기 직전에 공중으로 이끌려가서, 불타는 지구를 환희 속에서 내려
다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기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미국 정부가 아마겟돈 전쟁에서 악의 세
력과 싸우는 천상적 군대의 지상군을 지휘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위임받았
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미국이 벌이는 전쟁을 선을 위해서 악과 싸우는 아마
겟돈 전쟁이라고 정당화한다. 1980년대 초에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Ronald Reagan)은 한 인터뷰에서 “아마겟돈”이 눈앞에 서있다는 느낌이 종
종 든다고 말하였다. 그 당시에 레이건은 소련을 멸망시켜야 할 “악의 제국”
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들은 모두 요한계시록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다. 요한계시록은 결코 먼 미래에 발생할 재앙과 전쟁에 대한 예언의 목록집
이 아니다.
1) 아마겟돈 전쟁 환상은 미래에 일어날 전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요한의 시대에 이미 진행 중에 있었던 로마제국의 전
쟁에 관한 것이다.
2) 아마겟돈 전쟁은 요한계시록의 일곱 대접들의 환상
(15:5-16:21) 속에 나온다. 우리는 아래로부터 현실을 인식하는 요한계시록
의 저자의 관점에서 아마겟돈 전쟁 환상(16:13-16; 19:11-21)을 이해해야만
한다. 요한은 전쟁이 중단되기를 기대하고, 로마의 제국주의와 전쟁 체제를
반대하고, 또 전쟁이 더 이상 없는 평화를 희망하는 가운데 아마겟돈 전쟁을
“마지막 전쟁”으로 설정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1세기 말엽의 로마제국의 폭력적 성격과 우상 숭배적 성
격을 폭로하고, 황제예배와 제국주의 체제에 항의하는 지하문학이다. 요한은
로마제국의 현실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착취적인지를 충분히 경험하였기 때
문에 로마제국이 선전하는 “로마의 평화”에 동의하지 못하였다. 그는 관람석
에 앉아서 영화를 감상하는 중립적인 리포터로서가 아니라, 로마제국의 주변
부인 소아시아에서 실제로 고난을 당한 당사자로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무
죄한 피학살자들의 절규와 통곡을 듣고 있는 자로서, 로마가 일으킨 참혹한
전쟁을 경험한 자로서, 전쟁과 폭력의 역사가 속히 끝나기를 고대하고 평화
를 염원하는 자로서, 그리고 자주적인 삶을 희망하는 무력한 자로서 일곱 대
접들의 환상과 아마겟돈 전쟁 환상을 서술하였다.
요한은 로마제국이 장악하고 있는 현재의 역사를 살인적인 폭력의 역사
로 인식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정말 끔찍스러운 파국은 세계의 멸망이나 지
구의 파괴가 아니라, 로마가 일으킨 전쟁과 학살과 착취로 인해서 수많은 무
죄한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폭력의 역사가 앞으로도 지금처럼 이대로 계속해
서 진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의 하느님은 이 폭력의 역사를 반드시 끝낼
것이다. 요한은 로마제국의 막강한 힘이 작용하고 있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환상을 통해서 하느님이 과거의 바벨론을 심판한 것처럼 오늘의 바벨론인
로마제국을 심판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느님이 폭력
의 역사의 흐름을 단절시키고 억눌린 약자들을 해방하기 위해서 지금 로마
제국 안에서 새로운 출애굽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과
거에 하느님이 이집트에서 일으켰던 재앙들을 일곱 대접들의 환상 속에서
재현하고 또 현재화하였다.
한반도의 분단시대의 지속은 폭력의 역사의 견고한 흐름의 한 단면이
다.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와 수탈을 경험하였고, 한국전쟁의 비극을
경험하였고, 아직도 전쟁 위협과 분단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
우리는 분단시대를 끝내고 자주적 통일을 하루바삐 성취해야만 한다.
이러한 배경과 열망
을 가진 한 한국 신학자로서 나는 일곱 대접들의 환상과 아마겟돈 전쟁 환상
을 희생자들과 억눌린 약자들의 시각으로부터 읽고,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새
롭게 해석하고자 한다.
나는 일곱 대접들의 환상의 틀에서 아마겟돈 전쟁 환
상의 진정한 의미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와 전쟁체제에 대한 저항
과 대안적 공동체의 건설을 위해서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역시 요구되는 윤리적 책무를 주체
윤리라는 점에서 규명하고자 한다.
이 논문은 로마의 제국주의와 전쟁 체제
에 항의하고 폭력의 역사의 단절과 정의와 평화의 시대의 도래를 외치는 요
한계시록의 저자의 음성을 생생하게 들리게 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신자유
주의적 세계화가 강화시키는 폭력의 역사의 흐름을 깨뜨리기 위해서 반제반
전 운동, 평화운동, 반핵운동, 생태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그리고 자주적
통일운동에 투신하고 있는 남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실천을 신학적으로 옹
호하고 그들에게 영적 힘을 주고자 하는 희망 속에서 시도되었다.

II. 제국의 우상 숭배적 체제와 추종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
1. 일곱 대접들의 환상을 위한 서곡 (15:5-8)
일곱 대접들의 환상에 대한 암시는 이미 15:1에서 발견된다: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느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15:2-4에는 지상에서 생전
에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주 안에서
죽었기 때문에 하늘에서 모두 살아서 안식을 누리고 있으며, 그리고 거문고
를 연주하면서 “하느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로마제국의 유혹과 압제에 굴복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하였던 성도들이다. 그들은 “만국의 왕”은 로마황제가 아니라
하느님이라고 노래한다. 그들은 로마제국 한가운데서 새로운 출애굽을 일으
킨 하느님의 정의로운 행동을 축하한다.
15:5-8의 진술은 일곱 대접들의 환상(15:5-16:21)의 서곡이다. 하늘에서
“증거 장막의 성전”3)이 열리고 거기서 맑고 빛나는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매고 있는 일곱 천사들이 나온다(15:5). 하늘에 있는 “증거 장막의 성
전”은 출애굽 사건에 대한 기억의 현재화이다. 네 생물들 중의 하나가 하느
님의 진노가 가득 담긴 금 대접들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하나씩 주었다. 금
대접은 원래 성도들의 기도가 향과 함께 담겨있던 그릇이다(5:8). 일곱 천사
들은 성도들의 기도가 하느님의 귀에 상달되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진노가
가득 담긴 그릇을 쏟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느님의 진노의 대접들이 다 쏟
아지기 전에는 아무도 성전 안으로 들어 갈 수 없도록 성전 안에는 연기가
가득하다(15:8). 이것은 하느님의 심판이 반드시 실행될 것이라는 점을 시사
한다.

2. 첫째 대접부터 넷째 대접까지의 재앙들 (16:1-9)
그 후에 요한은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들에게 “너희는 가
서 하느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16:1)고 명령하는 것을 들었
다. 이제 첫째 천사에 의해서 대접이 땅에 쏟아진다.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
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 (16:2)
대접이 땅에 쏟아진 것은 일곱 나팔들의 환상에서 첫째 나팔이 불릴 때
땅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당한 것과 비슷하다. 땅에 쏟아진 첫째 대접의 재
앙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만 임하였다. 그들은 로마의
평화라는 정치적 선전을 수용하고, 제국의 체제에 순응하고 적응할 뿐만 아
니라, 제국의 우상에게 예배하는 우상숭배자들이다. 짐승에게 속한 자들은
누구나 오른 손이나 혹은 이마에 짐승의 표를 달고 있다(참조, 14:9-11; 19:
20; 20:4). 짐승의 추종자들이 달고 있는 표는 의인들이 달고 있는 표와 상반
되는 반신적인 표(7:1ff; 14:1)이다. 첫째 대접의 재앙으로 인해서 땅 위에 살
고 있는 짐승의 추종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발생하였다. 종기 재앙
은 출애굽의 열 재앙들 중의 여섯째 재앙과 같다(출 9:9-11). 하느님은 그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애굽의 종기”로 심판한다(신 28:27). 둘째
대접은 바다에 쏟아졌다.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6:3)
여기서 “죽은 자의 피”는 학살당한 희생자들이 흘린 피를 의미한다. 권
력자들은 무죄한 자들을 학살하고, 죽은 자들을 망각되도록 사회에서 배제시
켰지만, 하느님은 그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기 때문에 바다를 그
들이 흘린 피로 변화시킴으로써 학살자들의 악행을 백일하게 드러내었다.
바다가 피학살자들이 흘린 피로 변화되어서 바다 속의 생물들이 모두 죽었
다는 것은 학살자들이 역시 핏물로 변한 바다로 인해서 죽게 될 것을 암시한

다. 이 재앙은 모세가 나일 강을 피로 변화시켜서 그 안에 있는 고기들을
모두 죽게 만들었던 출애굽의 첫 번째 재앙(출 7:14-25)과 비슷하다. 둘째 나
팔 재앙은 바다의 삼분의 일만 피가 되게 하였지만(8:8-9), 둘째 대접 재앙은
바다 전체를 피로 변화시켰다. 이제 셋째 대접은 다음과 같이 강과 샘에 쏟
아졌다.
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의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16:4)
셋째 대접은 강들과 물의 근원을 전체적으로 피로 변화시켰다. 그러므
로 강과 샘은 모두 마실 수 없는 물이 되었다. 이 재앙은 역시 나일 강과
이집트의 다른 강들을 피로 변화시켜서 사람들이 그 물을 마실 수 없도록
만든 출애굽의 첫 번째 재앙과 비슷하다: “애굽 사람들은 나일 강물을 마실
수 없으므로 나일 강가를 두루 파서 마실 물을 구하였더라”(출 7:24). 시편
시인은 하느님이 이집트에 내린 재앙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들의 강과 시
내를 피로 변하여 그들로 마실 수 없게 하셨다”(시 78:44). 강과 물의 근원을
모두 피로 변화시킨 셋째 대접 재앙은 셋째 나팔이 나일 강과 샘들의 삼분의
일을 피가 되도록 한 것과 대조된다. 바닷물이 이미 피로 변화하였고(6:3),
이제는 강과 샘도 역시 피로 변했다. 그러므로 짐승을 추종하는 우상 숭배자
들과 악인들은 깨끗한 식수가 없기 때문에 피로 변한 물을 마셔야만 한다.
이것은 악인들이 자신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흘린 피를 마셔
야만하고, 자신이 남에게 저지른 악행 때문에 자신도 죽게 된다는 것을 의미
한다.
요한은 하느님의 이러한 보복 심판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세 번째 대접을 쏟은 후에 의도적으로 다음과 같은 찬송 단락을 삽입하였다.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이르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
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나이다(άξιoί) 하더라 또 내가 들으
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느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16:5-7)
요한계시록에서 하느님의 호칭은 일반적으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

시고 장차 오실 이”(1:4, 8; 4:8, 11, 17)이다. 그런데 “물을 차지한 천사”(참
조, 에녹1서 66:1-2)는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하느님이라고 부르며,
하느님 호칭의 셋째 요소인 “장차 오실 이”를 빼고, 그 대신에 15:4에서 이미
사용된 호칭인 “거룩하신 이”(16:5)를 보충하였다. 그 이유는 맑고 깨끗한 물
을 피로 변화시킨 재앙을 현재에 이미 임재하고 있는 거룩한 하느님의 심판
으로 보는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물을 다스리는 천사가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그들이 성도들
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나
이다(άξιoί)”라고 말하였는데, “합당하다”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 άξιoϛ(=
아키오스)의 본래적 의미는 무게를 재는 저울대에 균형을 정확하게 맞추는
것을 뜻한다. 이 단어의 이러한 본래적 의미를 살리면, 피를 마셔야만 하는
학살자들의 운명은 무죄한 자들을 죽이고 피를 흘리게 한 그들의 행위에 정
확하게 상응하는데, 그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피를 흘리고 죽은
“성도들과 선지자들”은 다섯째 봉인(6:9-11)이 열렸을 때 천상적 제단 아래
모여서 하느님께 심판과 신원을 호소하였던 학살당한 남녀 순교자들과 동일
화된다.4) 하느님은 그들의 억울한 죽음과 탄원을 기억하기 때문에 그들을
죽인 학살자들을 이제 심판하는 것이다. 악인들이 부당하게 저지른 불의는
심판의 날까지 매일 하느님 앞에 기록된다(에녹1서 98:6-8). 짐승과 그 추종
자들이 학살자들이라는 것은 요한계시록에서 후렴처럼 자주 나온다(참조,
2:13; 6:9; 13:15; 16:6; 18:24).5) 하느님은 정의로 세계를 심판하고 약자들의
권리를 회복시키는 심판자다: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
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
다”(시 96:13). 반면에, 불의하게 학살당한 무죄한 자들은 그들의 편에 서 있
는 하느님의 보복 심판 행위를 통해서 신원되고 권리가 회복된다: “하느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로마) 심판을 행하셨음이라”(18:20). 물을 다스리는
천사는 악인들의 악행을 그들 자신에게 그대로 갚은 하느님의 심판을 축하

하는 찬송을 하고, “제단”은 “그러하다 주 하느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
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16:7)고 화답한다.6) 여기서 “제단”은 천
상적 제단 아래 모여 있는 남녀 피학살자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다(참
조, 6:9-11).7) 이 찬송 단락은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의 성격을 반영
하고 있다. 그들의 예배는 하느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축하하는 축제로서의
예배이며, 또한 로마제국의 살인적인 폭력의 체제를 비판하는 항의로서의 예
배이다.
이제 찬송이 끝나고(16:5-7), 다시 대접들의 환상 이야기가 계속된다.
이제 넷째 천사가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해에 대접을 쏟아버린다.
넷째 천사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κα
υματίσαι) 사람들(ἄνθϱωποι)이 크게 태움(καûμα)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느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
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 (16:8-9)
여기서 하느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은 태양에 의해서 크게 태움(καûμα)
에 태워진 “사람들”(ἄνθϱωποι)은 누구인가? 그들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
니라, 짐승의 추종자들이다.8) 무죄한 사람들을 불태웠던 짐승의 추종자들이
이제 하느님의 보복으로 불태움을 당한다. “불로 사람을 태우는 것”은 몰록
숭배에서부터 유래한다. 몰록 숭배는 아버지가 그의 어린 자녀를 불태워서
받치는 인신 제사를 수반하였다. 그러므로 몰록 숭배는 이스라엘에서 엄격
하게 금지된 우상 숭배였다(참조, 레 18:21; 20:1-5; 왕하 23:1). 요한에게 있
어서 로마의 제국주의 체제와 황제예배는 구약시대에 불태움으로 아이들의
생명을 파괴하였던 몰록 숭배와 같다. 수많은 무죄한 자들을 불태움으로써
생명을 파괴한 로마의 제국주의 체제의 우두머리들과 그들의 협력자들은 이
제 자신들이 불태움을 당하는 보복 심판을 받는다. 이러한 그들의 운명은 그

들이 남에게 저지른 행위에 상응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재앙에도 불구하
고 그들은 자신의 죄악과 우상숭배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하느
님에게 책임을 돌리고 비난하였다.
짐승의 추종자들은 태양의 열로 태움을 당하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지
만, 그러나 로마의 우상 숭배적 체제에 저항하면서 어린양을 추종하는 성도
들은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 (καûμα)에 상하지도 아니 할 것”(7:16)을 보장
받는다. 그리스어 καûμα가 불태움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그 단어가 “기
운”으로 번역되었다. 예언서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다: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καύσων) 아니하리니 이
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
라”(사 49:10). 넷째 대접은 셋째 대접에서와 마찬 가지로 역시 남에게 입힌
악한 행위가 그 악행을 저지른 당사자에게 되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3. 다섯째 대접과 여섯째 대접의 재앙들 (16:10-12)

1) 다섯째 대접
이제까지는 심판의 대상이 자연계였지만, 다섯째 재앙은 짐승의 왕좌를
강타한다.
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
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느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16:10-11)
“짐승의 왕좌”는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제국의 통치권의 상징이다.9) 천
사에 의해서 하느님의 진노가 담긴 다섯째 대접이 짐승의 왕좌에 쏟아진 것
은 로마제국의 사탄적인 통치력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 짐승은 용으로부
터 권력 행사를 승인을 받고서 용의 통치를 대행한다(13장). 짐승의 보좌에
쏟아진 다섯째 대접의 진노는 두 가지 현상을 일으켰다.

첫 번째 현상은 짐승의 나라가 어두워진 것이다(참조, 6:12f; 8:12). 이
것은 로마제국이 외관상의 빛나는 찬란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어둠이 지
배하는 반신적인 제국이라는 것을 폭로한 것을 의미한다. 짐승의 제국은 어
둡지만, 그러나 반제국적 공동체는 대낮처럼 밝다(21:23-24; 22:5). 어둠은
출애굽의 아홉째 재앙이며, 그 때 어둠이 너무 짙어서 사람들이 서로 알아보
지 못하였다(참조, 출10:21-29, 특히 23절을 보라). 하느님은 어둠을 통해서
심판한다(암 5:20; 삼상 2:9; 사 8:22; 욜 2:2, 10, 31). 어둠은 하느님의 구원
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한다(참조, 지혜서 17장).
두 번째 현상은 악성 종기가 사람들에게 전염병처럼 일시에 발생한 것
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짐승을 추종하는 우상 숭배자들이다. 그러한 악성
종기는 어린양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제외하고, 오직 짐승의 체제에 순응하
고 협력하는 우상 숭배자들에게만 발생하였다. 짐승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재앙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하느님에게 돌리고 불평하면서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을 회개하지 않았다.
자신의 죄악을 하느님 앞에서 회개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구원
을 받는다: “만일 의인이 그 공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그로 말미암아 죽으
면 그 행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이요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겔 18:26-28).
하느님은 죄인의 구원을 위해서 회개를 지정하였다: “오 주님이시여, 당신은
지극히 선하시므로 당신께 죄를 지은 자들에게 회개와 용서를 약속하였으며,
당신의 자비가 무한하므로 당신은 죄인이 구원받도록 죄인을 위해서 회개를
지정하였나이다”(므낫세의 기도 7절). 하느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
은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희생자들과 화해하고 이제부터는 그들의 편에 서
서 그들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서 그들과 연대하여 폭력과 억압의 구조에 저
항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짐승의 추종자들은 자신이
저지른 악한 행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코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
2) 여섯째 대접
이미 셋째 대접 재앙이 여러 강들에 쏟아진 것이 언급되었지만, 여섯째

대접에서 특별하게 “큰 강 유브라데”가 인용되고 있다. 이것은 여섯째 나팔
에서 “큰 강 유브라데”(9:14)가 언급된 것에 상응한다.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 (16:12)
유브라데 강은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의 경계천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
고(참조, 출 23:31; 신 1:7; 수 24:2; 왕상 4:21; 왕하 24:7), 그리고 “큰 강”으
로 불린다(창 15:18; 신 1:7; 수 1:4). 구약시대에는 유브라데 동쪽에 바빌로
니아, 앗시리라, 메데, 그리고 페르시아가 있었으며, 이러한 제국들은 유브라
데 강을 건너서 이스라엘을 침략하였었다. 1세기 말엽의 요한의 시대에 유브
라데 강은 로마제국의 영토의 경계천이었고, 강 건너 편에는 여러 나라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파르티아(Parthia) 제국이 가장 힘이 있었다.
그런데 천사가 여섯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자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12절)을 위한 길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강
물을 말린 전례가 구약에 여러 번 있다(참조, 사 11:15; 44:27; 렘 50:38). “동
방에서 오는 왕들”(12절)은 누구인가? 그들이 유브라데 건너온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러 학자들은 “동방에서 오는 왕들”을 로마제국의 영토를 기습
적으로 침략하는 파르티아(Parthia) 제국의 왕들이라고 설명한다.10)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에 예속된 식민지인들에게
있어서 로마제국의 지배와 파르티아 제국의 지배 사이에는 인민의 예속과
억압이라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점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유브라
데 강을 넘는 “동방에서 오는 왕들”은 로마제국의 영토를 침략한 적들로서가
아니라, 세 더러운 영들의 부추김에 의해서 로마의 제국주의 전쟁에 동맹군
으로 참전하도록 미혹된 “온 천하 왕들”(16:14)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본

다.11) 그들은 로마의 동맹군들로서 아마겟돈에 집결하기 위해서 그 강을 건
너온 것이다(참조, 16:16). 이러한 해석은 아마겟돈에 집결한 왕들이 동방의
왕들을 대적하지 않고, 하느님의 대리자인 천상적인 예수에게 대적한다는 점
에서 뒷받침된다.
만일 이러한 해석이 정당하다면, 유브라데 강이 말라서 동방의 왕들이
그 강을 쉽게 건너 온 것이 어떤 의미에서 로마제국에 대한 하느님의 재앙인
가? 로마제국은 “로마의 평화”라는 정치적 선전을 통해서 인민들을 속이지
않고서는 지탱될 수 없는 폭력적인 체제였다. 유브라데 강물이 평상시처럼
흐르는 동안에는 “로마의 평화”라는 공식적 선전을 통한 기만이 유효하였기
때문에 로마제국은 동맹국들과 모의한 전쟁 전략을 은폐할 수 있었고 인민
들의 협력을 계속해서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천사가 여섯째 대접을
유브라데에 쏟아서 강물을 말리고 길을 냄으로써 동방의 왕들이 로마의 동맹
군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그 강을 쉽게 건너올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은 로마가
숨겼던 전쟁 전략과 호전성이 백일하에 노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로마는 평화 애호가가 아니라, 평화 파괴자라는 것이 폭로되었기 때문에 로마
는 이제부터 더 이상 로마의 평화라는 정치적 선전을 통해서 인민들을 속일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제국의 유지를 위한 그들의 협력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제국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고 재앙인 것이다.

4. 여섯째 대접과 일곱째 대접 사이의 현재의 시간 (16:13-16)

1) 아마겟돈 전쟁의 본문적 위치
요한이 마지막 전쟁으로 설정한 아마겟돈 전쟁(16:13-16)이 일곱 대접
들의 환상(15:1-16:21)의 도식 중에서 어느 단계에서 발생하는지를 통찰하는

것이 그 전쟁에 대한 해석에서 매우 중요하다. 일곱 대접들의 환상의 도식에
서 처음 대접부터 여섯째 대접까지의 재앙들은 이미 일어난 지나간 사건들
이며, 일곱째 대접의 재앙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적 사건이다. 일곱째
대접의 재앙은 마지막 재앙으로서 로마제국과 동맹국들을 붕괴시킴으로써
로마의 제국주의 체제를 영원히 해체시킨다.12) 이러한 도식에서 여섯째 대
접(16:12)과 일곱째 대접(16:17-21) 사이의 시간이 바로 요한과 그의 수신자
들이 로마제국과 대결하고 있는 현재의 시간이며, 아마겟돈 전쟁(16:13-16)
은 바로 그 두 대접들의 틈새에 위치한다. 우리는 이러한 도식을 통해서 요
한계시록의 저자가 아마겟돈 전쟁을 현재의 시간에 발생하는 마지막 전쟁으
로 설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겟돈 전쟁(16:13-16)은 여섯째 대접
이야기의 일부가 아니다.13) 아마겟돈 전쟁 이야기는 16:16에서 중단되지만,
그 전쟁의 과정과 결과는 19:11-21에서 서술되고 있다.14)
현재적 시간에 대한 일곱 대접들의 환상의 구조는 일곱 나팔들의 환상
(8:2-11:19)에서도 발견된다. 여섯째 대접과 일곱째 대접 사이의 현재적 시간
(16:13-16)에는 로마의 지배를 합법화하고 아마겟돈 전쟁을 부추기는 로마의
제국주의 선전 활동이 부각되어 있으며, 반면에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의 현재적 시간(10:1-11:13)에는 로마의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증인들의
반제국적 증언 활동이 부각되어 있다.

2) 전쟁을 일으키는 제국의 영과 그리스도인들의 반제반전 투쟁
(1) 전쟁을 부추기는 제국의 영
요한의 수신자들이 숨 쉬고 있는 현재의 시간에 로마의 제국주의 선전

활동과 기독교적 공동체의 반제반전 투쟁과 증언 활동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제국의 현실에 대한 인식은 그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기독교적 정체성의 유지는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행동하느냐에 달려있기 때
문이다. 그들은 개개인이 주체로서 우상숭배적인 제국의 체제에 저항하는 충
성된 증인의 삶을 살 수도 있고, 또는 제국의 유혹과 압제에 굴복하거나 타협
함으로써 객체로 전락하고 제국의 체제에 적응하고 협력하는 종이 될 수도 있
다. 요한은 전쟁을 부추기는 제국의 악마적 현실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πνεύματα)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그들은 귀신의 영(πνεύματα δαιμονίων)이라 이
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느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
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6:13-14)
요한은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주둥
이들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용과 짐승(=로마제국)과 거짓 예언
자(=식민지의 친로마적 토착 엘리트들)는 기독교적 공동체의 증언 활동을
억압하는 제국의 지배 체제의 상징이다. 용과 짐승과 거짓 예언자는 이미 요
한계시록 13장에서 자세히 서술된 사탄의 삼위일체이며, 거기서 묘사된 둘
째 짐승, 곧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여기서는 “거짓 선지자”로 불린다. 개구리
는 레위기에 의하면 부정한 짐승에 속하며(출 8:1-7; 레 11:10-12), 또한 이집
트에 내려진 열 가지 재앙 중에서 두 번째가 개구리 재앙이었다. 악마적 삼
위일체의 주둥이들에서 나온 세 더러운 영(πνεύματα)이 개구리처럼 보였다
는 것은 그들의 주둥이들로부터 나온 소리는 개구리의 개골개골하는 시끄럽
고 무의미한 소리처럼 사람들을 현혹하는 정치적 선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15)
요한은 그들의 주둥이들로부터 나온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들을 “귀
신의 영”(πνεύματα δαιμονίων), 곧 악마의 영이라고 더 자세히 설명한다.
이것은 세 더러운 영들이 일으키는 전쟁은 반신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악
마의 영은 곧 “제국의 영”인 것이다.16) 세 더러운 영들의 전략은 여러 가지

이적들을 행하는 것이다.17) 이적들을 통해서 전 세계의 왕들을 부추겨서 전
쟁을 일으키는 제국의 영은 제국의 전쟁을 반대하고 항의하는 그리스도인들
을 대적한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
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
래 위에 섰더라”(12:17).
요한은 귀신의 영이 “하느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16:14)에 있을 전
쟁을 위하여 “온 천하 왕들”을 소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큰 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선의 군대와 악의 군대가 서로 충돌하는 전투의
날이 아니라, 하느님이 적들을 심판하고 멸절시키는 날을 의미한다.18) “여호
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요엘 1:11). 요한은 요엘
서의 이 구절로부터 “하느님의 큰 날”을 전승하여 귀신의 영이 일으킨 전쟁이
하느님의 큰 날에 결정적으로 패배하는 마지막 전쟁이 될 것을 희망하였다.
하느님은 전쟁을 반대한다. 하느님은 전쟁의 종식과 전쟁 무기의 철폐
를 요구한다: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례를 불사르시는도다”(시편 46:9):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
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
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
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사 2:4; 참조, 미 4:3); “또 이 땅에
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호 18:18b).
(2)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의 주체 윤리
세 더러운 영들이 전쟁을 부추기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대
처해야 하는가? 제국의 선전에 의해서 전쟁이 정당화되는 상황에서 요한의
수신자들에게 요구되는 윤리적 책무는 무엇인가? 요한은 천상적 예수의 입
을 통해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ἔρχομαι)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6:15)

이것은 요한의 수신자들을 향한 간접적인 형태의 윤리적 명령이다. “오
리니”(ἔρχομαι)는 현재 시제이다. 이것은 여섯째 대접과 일곱째 대접 사이
의 현재의 시간에 로마의 제국주의 체제와 전쟁 체제를 중단시키기 위해서
억눌린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오는 부활한 예수의 현재적 오심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폭력의 역사를 지금처럼 그대로 진행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반
드시 단절시킬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최종적인 심판 전에 그의 대리자인
부활한 예수가 억눌린 약자들과 함께 연대하는 반제반전 투쟁을 통해서 로
마의 제국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폭력의 역사의 흐름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지금 현재의 시간에 오고 있다. 그는 지금 짐승과 대결하고 있는 기독교적
공동체의 저항과 투쟁 속에서 자신을 현시하며, 그리고 마침내 제국의 억압
적 구조를 상징하는 존재들인 짐승과 거짓 예언자와 땅의 왕들을 정복할 것
이다(19:11-21).
예수의 현재적 오심을 적극적으로 기다리면서 그와 연대하는 사람은 로
마제국의 유혹과 압제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
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도둑을 대비하지 못하고 잠에 빠진 자가 도둑을
맞은 후에 당황하여 허둥대는 것처럼 폭력의 역사의 흐름을 중단시키기 위
한 예수의 갑작스러운 오심을 기다리지 않는 자는 객체로 전락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다. 예수의 갑작스러운 현재적 오심은 3:3절에서도 이미 언급되었
다: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
라.” 바울도 역시 비슷한 말을 하였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살전 5:2). 복음서에도 부활한 예수가 뜻
밖의 시간에 찾아오심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24).
“자기 옷”(16:15)은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바울
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
었느니라”(갈 3:27)고 하였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십자가
처형을 당하였지만 정의의 하느님에 의해서 부활한 예수와 연대하여 폭력의
구조를 허물고, 폭력을 중단시키는 일에 그리고 평화와 생명의 공간을 창조
하는 일에 헌신하는 주체로서의 새로운 삶의 여정을 통해서 유지된다. “깨어
자기 옷을 지키는 것”에서 요구되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책무는 제국의 영
이 전쟁을 부추기고 있는 현재의 시간에 폭력의 역사의 견고한 흐름을 중단
시키기 위해서 오고 있는 부활한 예수를 적극적으로 기다는 것이며, 그와의

연대를 통해서 반제반전 투쟁의 주체가 되는 것이고, 그리고 평화와 생명이
지배하는 반제국적 공동체 건설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속적인 로
마의 제국주의 체제와 전쟁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요한의 주체 윤리라고 불
릴 수 있다. 예견되는 고난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부활한 예수와 연대 투쟁하
는 주체로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삶이 값진 삶이기 때문에 요한
은 예수의 입을 통해서 그의 수신자들에게 깨어서 자기 옷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참조, 22:7)고 말한 것이다. 반면에 부활한 예수의 현재적 오심
을 기대하지 않는 태만한 자는 역사를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객체
로 전락하기 때문에 “벌거벗고 다니고,” 또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참조, 3:17).

3) 제국의 영이 일으킨 아마겟돈 전쟁의 과정과 결과
(1) 아마겟돈 전쟁의 동맹군들 (16:16)
제국의 악마적 영들은 표징을 통해서 모든 지상의 왕들을 한 곳으로 소
집할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16:14에서 악마적 삼위일체의 주둥이들에서
나온 더러운 영들이 “온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느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
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그 장소가 이
제 아마겟돈이라고 불린다.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Aρμαγєδδώѵ)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
라. (16:16)
여기서 왕들을 불러 모은 지배적 주체는 16:14에서 귀신의 영으로 규정
된 세 더러운 영들이고, 객체는 거기서 언급된 “온 천하 왕들”이다. 제국의
악한 영들의 미혹을 받은 왕들은 전쟁을 위해서 아마겟돈이라고 불리는 장
소에 소집되었다. 아마겟돈('Aρμαγєδδώѵ)은 산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הר
(하르)와 예루살렘의 북쪽에 위치한 평야의 지명인 מגדו (므깃도)를 조합한 히
브리어 הר מגדו (har megiddó=므깃도의 산)의 그리스어 음역이다. 므깃도는
평야이고, 멀리 떨어진 곳에 갈멜산(왕상 18장)이 있다.19) “무깃도의 산”이
라는 표현은 구약과 유대 묵시문학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도대체

왜 세계의 마지막 전쟁이 아마겟돈에서, 즉 므깃도의 산에서 일어나는 것으
로 표현되어 있는가? 그 이유는 모든 전쟁의 진행을 중단시키는 마지막 전투
에 대한 요한의 희망이 이스라엘 역사상 중요한 전투들이 발생한 격전지로
서 므깃도에 대한 그의 기억과 결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사사 드보라와 사
사 바락은 므깃도에서 시스라가 이끄는 거대한 가나안 군대를 패배시키고
(삿 5:19ff; 4:1-5:18) 가나안 왕 야빈의 통치 아래서 20년 동안 학대당하였던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켰다(삿 4:3). 그리고 요시아 왕은 므깃도에서 이집
트 군대와 맞서 싸우다가 패배하고 그들에 의해서 살해당하였다(왕하
23:29-30; 역하 35:20-25). 드보라와 바락의 승리는 이스라엘 왕국의 건설의
단초가 되었으며, 요시아 왕의 패배와 죽음은 이스라엘 왕국의 몰락의 단초
가 되었다.20) 요한은 이러한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기억하면서 세계의 슈
퍼파워인 로마제국이 벌이는 전쟁이 하느님의 날에 하느님의 심판을 통해서
결정적 패배를 당할 장소를 유명한 격전지인 아마겟돈, 곧 “므깃도의 산”이
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전쟁이 발생할 장소로서의 아마겟돈
은 지리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상징적 의미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2) 아마겟돈 전쟁의 과정과 결과 (19:11-21)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16:13에서부터 시작하지만, 그 전쟁의
과정과 결과에 대한 언급이 없이 16:16에서 중단되었다. 그러나 요한은 아마
겟돈 전쟁에 대한 이야기의 중단된 맥을 19:11-21에서 다시 잡고, 그 전쟁에
대한 설명을 계속한다. 그런데 이제 그 전쟁의 이야기는 지상이 아니라, 천
상적 지평에서부터 전개된다.
내가 또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δικαιοσύνη)로 심판하며 싸우더라(κρίνει καὶ πολ
εμει) 그 눈은 불꽃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느
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느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하였더라. (19:11-16)
“내가 또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19:11)라는 표현은 “하늘에 열린 문이
있어”(4:1)와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15:5)와 마찬가지로 역사
의 불가시적인 초월적 차원이 계시를 통해서 열린 것을 의미한다. 요한이 하
늘의 열린 문을 통해서 제일 먼저 본 것은 “백마와 그것을 탄 자”이다. 흰
말을 타고 있는 자가 천상적 예수라는 것은 그의 이름이 “충신과 진실”로 불
린다는 점에서 분명하다. 이미 1:5와 3:7에서 천상적 예수는 순서대로 “충신”
과 “진실”로 불린다.
또한 19:11에는 아마겟돈 전쟁터에 나타나서 싸우는 천상적 예수의 두
가지 역할이 나타나 있다. 흰 말을 타고 있는 천상적 예수는 “공의(δικαιοσύ
νη)로 심판하며 싸우는”(κρίνει καὶ πολεμει) 메시아이다. 여기서 두 동사의
시제는 모두 현재이다. 이 전쟁에서 그의 역할은 정의로 심판하는 심판자이고,
그리고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 투사이다(참조, 시 9:9).

심판자와 투사로서의
천상적 예수의 역할은 구약과 유대 묵시문학으로부터 전승된 것이다. 하느님
의 대리자인 메시아가 정의로 심판하는 것이 이사야 11:4-5에 나타난다. 거기
서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싹으로 기대되는 메시아적 왕은 “공의( צדק =체데크)
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술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
צדק) )로 그의 허리띠를 삼아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고 기술되어 있
다. 에티오피아어 에녹서(=에녹1서)에는 약자들과 희생자들을 옹호하는 심판
자와 투사로서의 메시아의 역할이 매우 현저하게 나타난다.21) “이 사람은 인

자이다. 그에게 정의가 속하고, 정의가 그에게 머물러 있다.…… 네가 본 이
인자는 왕들과 권력자들을 그들의 안락한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그리고 강한
자들의 왕위를 빼앗을 자이다. 그는 강한 자들의 고삐를 파괴하고 죄인들의
이를 부서뜨릴 것이다. 그는 왕들을 그들의 보좌와 제국들로부터 폐위시킬
것이다”(에녹1서 46:3-5).
아마겟돈 전쟁은 천상적 예수에 의해서 발발된 전쟁이 아니라, 이미 오
래전부터 발생해서 요한의 시대에 진행 중에 있는 제국의 전쟁이다.22) 즉,
이 전쟁은 용에 의해서 시작되었고(12:17), 용으로부터 권력을 받은 짐승에
의해서 대행되었고(13:7), 그리고 짐승과 거짓 예언자에 의해서 미혹된 왕들
에 의해서 지금 계속되고 있다(16:13-16). 천상적 예수가 심판자와 투사로서
이 전쟁에서 싸우는 목적(19:11)은 약자들의 생명을 파괴하는 로마의 제국주
의 전쟁의 확산을 가로막고 전쟁 체제를 소멸시킴으로써 이 세계에서 전쟁
을 영원히 없애기 위한 것이며, 또한 제국의 강자들이 저지른 죄악의 희생자
들의 빼앗긴 인권과 권리를 되찾아주고 정의를 회복시켜줌으로써 그들이 주
체로서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반제국적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흰 말을 타고 있는 자의 “눈이 불꽃같고 머리에 많은 관들이” 있다(참조,
1:14; 단 10:6).

천상적 예수의 불꽃같은 눈은 그가 로마제국의 현란한 정면
뒤에 있는 불의와 비참을 볼 수 있는 예리한 분별력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반면에 시력을 상실한 눈은 이 사회 안에 가려져 있는 억압과 차별을 식별하
지 못할 것이다.23) 관은 왕적 권력의 상징이다. 천상적 예수는 사탄과 짐승보
다 훨씬 더 월등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사탄은 일곱 개의 관(12:13)
을 가졌고 짐승은 열 개의 관(13:1)을 가졌지만, 천상적 예수는 머리에 “많은
관들”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로써 천상적 예수가 제국의 전쟁을 이기고 전쟁
을 영원히 끝내고 약자들의 권리를 회복하고 정의를 수립할 수 있는 권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그는 약자들의 편에서 서서 그들의 빼
앗긴 권리를 되찾아주고 인권을 회복시켜주는 정의의 심판자이다.
천상적 예수의 또 다른 특징이 언급되어 있다: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다(19:12). 비밀스러운 이름은 2:17에도 언급

되어 있다: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
라.” 흰 말을 탄자의 “옷과 다리”에 남이 알 수 없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다
는 것은 일종의 부적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연유된 표현일 수 있다.24) 토속적
인 관념들에 의하면 부적에 적힌 이름을 아는 자는 악마들과 귀신들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요한에 의해서 그의 수신자들에게 알려진 흰 말을 탄 천상적
예수의 이름은 “충신과 진실”(11절)이고, “하느님의 말씀”(13절)이고, 그리고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16절)이다. 요한의 수신자들은 천상적 예수의 이
러한 이름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가 제공하는 보호와 안전을
눌릴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피 뿌린 옷”을 입은 채로 흰 말을 탄 자(19:13)는 로마의 군인들에 의
해서 잔혹하게 처형당한 예수와 동일화되는 것이 명백하다.25) 그의 옷에 묻
은 피(19:13)는 아마겟돈 전쟁 이전에 이미 갈보리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흘린 예수 자신의 피다.26)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흰 말을 탄
천상적 예수를 따르는 “하늘에 있는 군대들”은 순교자들과 죽은 의인들이
다.27) 그 천상적 군대는 16:16에서 서술된 아마겟돈에 집결한 왕들의 군대에
맞서는 대항 세력이다. 백마를 탄자의 유일한 무기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이다. 그것은 그의 말씀의 강력한 힘을 상징하는 은유이다. 그는
그 검을 가지고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린다”(19:15). 이

것은 메시아의 기능을 나타내는 시편 2:9의 인용으로서 12:5에도 나온다. 또
한 천상적 예수의 심판자로서의 기능은 그가 “하느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
한 진노의 포도주 틀”(19:15)을 밟는 데서도 나타난다.28) 진노의 포도주 틀
은 이미 14:19-20에서 나온 주제이며, 거기서는 포도주 틀에서 나온 악인들
의 피가 깊이가 말굴레까지 되고, 길이가 1600 스다디온에 이르는 강을 이루
었다. 이러한 끔찍한 표현에는 하느님의 복수 행위를 요청하는 희생자들과
무력한 자들의 기원과 로마가 일으킨 제국주의 전쟁과 대량학살에 대한 그
들의 항의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폭력의 희생자인 예수는 제국의
영이 부추긴 전쟁을 가로막기 위해서 전쟁터에 나타났으며, 그는 오직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검을 가지고 적들과 싸워서 승리한다.29) 이제 요한은 아마겟
돈 전쟁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 공중에 나는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느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살과 장군들(χιλιράχων)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 또 내가 보니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
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
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 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 (19:17-21)
한 천사는 큰 소리로 공중에 날아가는 새들에게 전쟁터에서 쓰러진 시
체들의 살을 뜯어먹으라고 큰 소리로 외친 이유는 이제 전투가 곧 개시될
것이며, 수많은 시체들이 전쟁터에서 쓰러질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것
은 에스겔 39:17-18로부터 전승된 것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
셨느니라 너 인자야 너는 각종 새와 들의 각종 짐승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모여 오라 내가 너희를 위한 잔치 곧 이스라엘 산 위에 예비한 큰 잔치로

너희는 사방에서 모여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실지어다 너희가 용사들의 살을
먹으며 세상 왕들의 피를 마시기를 바산의 살진 짐승 곧 숫양이나 염소나
송아지를 먹듯할지라.”
위에서 인용된 에스겔 39:17-18에 없는 “장군들”(χιλιάρχων)이라는 군
대 계급 명칭이 아마겟돈 전쟁터에서 죽은 적들의 범주들을 설명하는 19:18
에서 사용되었다.30) 그 명칭은 요한의 시대에 통용되고 있었던 군대 계급으
로서 천부장을 의미한다. 이 사실은 요한이 구약을 통해서 그의 시대의 현실
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종들”은 출정군의 병참 지원
을 위해서 동원된 민간인들이다.31) 제국의 전쟁에 참여한 왕들과 장군들과
장사들과 그 밖의 모든 참전자들이 모두 이제 마지막 전쟁인 아마겟돈 전쟁
터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들의 시체가 새들의 먹이가 되는 희생자들의 위치
로 전환되었다. 그들의 비참한 운명은 전쟁을 일으키고 무죄한 약자들을 무
자비하게 살육한 그들의 악한 행동에 상응한다. 이 역전은 무죄한 자들을 학
살한 출정군을 보복하는 하느님의 심판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터에 쓰러져 있는 모든 적들의 시체에 대한 환상은 로마제국의 변방에
서 실제로 빈번하게 발생하였던 여러 전쟁에서 참혹한 죽임을 당하고 전쟁
터 여기저기에 켜켜이 쌓여있던 무죄한 사람들의 시체에 대한 요한의 기억
이 생생하게 반영된 것으로, 그리고 동시에 전쟁과 잔혹한 대량학살에 대한
그의 반대와 항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16:16에서는 전쟁을 위해서 아마겟돈에 모인 자들은 단지 “왕들”이지
만, 19:19에서는 “짐승”이 동맹국의 왕들과 함께 전쟁 주모자로 분명하게 언
급되어 있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켰다.” 요한은 여기서 짐승을 보충함으로써
아마겟돈 전쟁이 로마가 일으킨 제국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더욱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서술은 실제의 전쟁에 관한 전쟁일지가 아니다.
아마겟돈 전쟁의 발단과 결과에 대한 묘사는 초현실적이다. 요한은 이 전쟁
의 과정에 대해서는 설명을 생략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만 말한다. 천상적
예수의 군대와 짐승의 군대가 서로 대치하고 있지만, 쌍방 간에 무력을 사용

하는 전투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흰 말을 탄 천상적 예수를 따르는 군대
는 비무장이며 어떠한 전투 행위도 하지 않는다. 오직 흰 말을 타고 있는
천상적 예수가 혼자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19:15, 21)을 가지고
싸운다. 그의 무기는 로마 제국의 무기와 아주 다르다. 이미 위에서 언급했
듯이 그의 입에서 나온 검은 날카롭고 강력한 말씀의 힘을 상징한다.
전쟁을 일으킨 중심 세력인 짐승과 거짓 예언자는 천상적 예수의 입에
서 나온 검(참조, 1:16; 2:12)에 의해서 사로잡혀서 산채로 유황불 못(참조,
단 7:11; 에녹1서 10:6)에 던져져서 파괴되었다(19:19-20).32) 거짓 예언자는
둘째 짐승, 즉 땅에서 올라온 짐승으로서(13장)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
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20절)이다. 소아시아의 토착
엘리트로서 거짓 예언자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합법화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친로마적 선동가이다. 짐승과 거짓 예언자가 유황불 못에 던져
진 것은 전쟁을 일으키는 제국의 전쟁 체제와 제국주의 체제가 완전히 소멸
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그들의 시체는 새들의 먹이가 되었다(19:21). 여기서 “그 나머지”는
이 전쟁에 동맹군으로 출정한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19절)이다.
천상적 예수는 그의 입에서 나온 검, 곧 말씀의 힘을 통해서 아마겟돈
전쟁을 끝내고 승리하였다.33) 이것은 전쟁은 더 큰 폭력의 힘을 통해서가
아니라, 비폭력의 힘을 통해서 극복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미래
는 폭력의 힘을 숭배하는 지배자들과 학살자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무력
하게 고난당하고 처형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무력함의 힘과 비폭력의 힘을
믿고 그를 충성스럽게 따르는 무력한 자들과 희생자들에게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5. 일곱째 대접과 하느님의 진노의 끝남 (16:17-21)
하느님의 진노는 일곱째 대접이 쏟아질 때 비로소 자자들었다(참조

15:1, 8). 일곱 대접들의 환상의 절정은 일곱째 대접에서 일어난 바벨론의
멸망이다.34) 일곱째 대접은 우상숭배적인 로마제국의 멸망과 제국주의 체제
의 파괴에 대해서 서술한다. 그것은 새로운 출애굽과 하느님의 심판이 역사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는 것을 의미한다.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부터 나서 이르
되 되었다(Γεγονεν) 하시니 번개와 음성들과 우랫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
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느님 앞에 기억하
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 또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
리매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느님을 비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
라. (16:17-21)
일곱째 천사가 일곱째 대접을 공중에 쏟았다. 공중은 악령들이 거하는
보이지 않는 영역이지만, 땅의 차원에 속한다(참조, 엡2:2). 이것은 사탄이
장악하고 있는 로마제국의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에 대한 타격을 의미한다.
이 재앙과 함께 마침내 폭력의 역사가 끝났기 때문에 성전의 보좌로부터 “되
었다”(Γεγονεν)(참조, 10:7)고 외치는 “큰 음성”이 들렸다(참조, 11:15). 그
큰 음성은 하느님의 목소리이다(참조, 사 66:6).35) “되었다”(Γεγονεν)라는
선언은 15:1에서 언급된 하느님의 진노가 심판을 통해서 마침내 최종적으로
마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10:7). 이것은 일곱 대접들의 환상의
서론에 해당하는 15:1에서 “하느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라고 한
것과 잘 맞으며, 또한 일곱째 나팔의 심판(11:15-19)에 상응하는 것이다.36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18절)라는 표현
은 일곱째 대접의 재앙이 역사 안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의
미한다.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18절) 그 때까지 없었던 큰 지진이
발생한 것은 단 21:1을 연상시킨다: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
까지 없던 환란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에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
을 받을 것이라.” 하느님은 일곱째 대접의 재앙을 통해서 두 가지 차원의 심
판을 일으킴으로써 마침내 폭력의 역사를 완전히 끝내었다.
첫째로 하느님은 로마의 제국주의 체제를 심판하였다. “큰 성 바벨론”
은 로마를 상징하는 은유이다(참조, 14:8). 큰 지진으로 인해서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졌다”는 것은 동맹국들과 함께 제국주
의 전쟁을 일으키고 무죄한 약자들을 억압하고 학살한 로마의 제국주의 체
제와 전쟁 체제가 하느님의 심판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심판에 대한 요한의 묘사는 이사야 24:19-20을 연상시킨다: “땅이 깨
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이러나지 못하리라.” “바벨론이 하느님 앞에서 기억하신바 되어”라는
표현은 하느님이 바벨론의 악행을 모두 기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죄
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느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18:5). 바
벨론은 무죄한 자들을 학살하고 그들을 사회에서 배제하였지만, 하느님은 정
의와 신원을 호소하는 죽은 자들의 통곡과 절규를 통해서 바벨론의 악행을
기억하고 있다(참조, 6:9-11).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은 바벨론의
비참한 운명은 무죄한 자들의 피를 흘린 자신의 행위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심판인 것이다: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대로 너
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욥 1:15). 하느님
이 바벨론을 심판하는 이유는 단지 그리스도인들의 순교 때문만이 아니라,
기독교적 공동체의 울타리 밖에 있는 로마의 제국주의 체제의 모든 무죄한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 때문인 것이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느니라”(7:24).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참조, 시 97:5)는 역시 바벨론에 대한 하느님
의 심판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다: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원수에
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사
59:18).

둘째로 하느님은 로마의 우상 숭배적인 제국주의 체제와 전쟁 체제를
묵인하고, 적응하고, 그리고 협력하는 사람들을 우박 재앙으로 심판하였다.
하늘로부터 “무게가 한 달란트”37) 정도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
곧 짐승의 추종자들에게 내렸다(16:21). 우박은 출애굽의 일곱째 재앙(참조,
출 9:13-35)이다. 하느님은 우박을 내려서 적들을 멸하기도 하고(참조, 수
10:11; 사 30:30; 겔 38:22), 또는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기도 한다: “우
박을 떡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 추위를 감당하리요, 그의 말
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시편
147:17-18). 그러나 제국의 체제에 순응하고 협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우박
재앙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하느님을 비방하였기 때문에
(16:21) 모두 멸망되었다.
일곱째 대접의 재앙이 일으킨 이러한 두 가지 차원의 심판을 통해서 로
마제국과 그 추종자들은 심판을 받았지만, 로마제국의 억압적인 체제의 희생
자들은 신원되고 억눌린 약자들은 해방되었다. 바벨론과 동맹국들의 멸망과
악인들의 멸망은 지구의 파괴나 세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
의 역사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형제자매적인 사랑과 평화와 정
의가 지배하는 새로운 대안적인 세계의 시작을 의미한다.

III. 결론
일곱 대접들의 환상은 폭력의 역사가 지금처럼 이대로 계속되지 않고
하느님의 심판으로 반드시 끝난다는 것과 남에게 입힌 악한 행위는 그 악행
을 저지른 당사자에게 그대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느님은 로마
의 제국주의의 희생자들을 기억하기 때문에 바벨론을 파괴하고 짐승의 추종
자들을 심판하였다(참조, 신 32:35). 악인들의 운명은 무죄한 약자들의 생명
을 파괴한 그들의 행위에 정확하게 상응하는 보복 심판이다. 그러나 하느님
은 인간의 보복을 허용하지 않는다(참조, 롬 12:19; 히 10:30).
여섯째 대접과 일곱째 대접 사이의 현재적 시간에 발생한 아마겟돈 전

쟁은 로마제국이 일으킨 제국주의 전쟁이다. 로마의 폭력의 희생자인 천상
적 예수가 심판자와 투사로서 그 전쟁의 확산을 가로막고 끝냈다. 그가 싸우
는 목적은 로마의 제국주의 체제와 전쟁 체제를 소멸시킴으로써 폭력의 역
사를 단절시키는 것이며, 그리고 제국의 희생자들의 빼앗긴 인권과 권리를
되찾아주고, 정의를 회복시켜줌으로써 형제자매적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반
제국적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그는 오직 그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
즉 말씀의 강력한 힘을 무기로 삼고 제국의 전쟁 체제를 소멸시키고 그 전쟁
을 승리하였다. 그것은 그의 무력함의 힘과 비폭력의 힘을 통한 승리이다.
요한은 전쟁의 중단과 전쟁이 더 이상 없는 평화를 희망하는 가운데 천
상적 예수가 제국의 전쟁 체제를 소멸시키는 묘사를 통해서 아마겟돈 전쟁
을 마지막 전쟁이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아마겟돈 전쟁 환상은 모든 전쟁의
종식과 평화를 희망하는 요한의 반제반전 투쟁과 평화 기원을 나타내는 반
제국적 담론으로 새롭게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제부터 “아마겟돈 전쟁”은 미
국의 전쟁을 정당화하거나 또는 지구를 멸망시킬 핵전쟁의 메타포로서가 아
니라, 전쟁 체제의 종식과 평화를 희망하는 억눌린 약자들의 반제반전 투쟁
과 평화 기원의 메타포로 통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환상 속에서 아마겟돈 전쟁은 천상적 예수의 승리로 끝났고 로
마의 전쟁 체제가 영원히 소멸되었지만, 그러나 요한의 수신자들의 현실 세
계에서 로마제국의 권력구조는 아직도 아무런 변화가 없고, 제국의 변두리에
서 침략 전쟁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고, 그리고 힘없는 나라들과 약자들은
사실상 초강대국인 로마제국 앞에서 여전히 항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
나 천상적 예수의 승리와 전쟁 체제의 파괴에 대한 요한의 그림은 그들에게
수동적으로 종말을 기다리면서 하늘의 세계로 도피하게 하는 종교적 아편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주체적인 삶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평화와 생명과
정의가 지배하는 대항 현실인 것이다. 물론 그러한 대항 현실이 아직 그들이
숨 쉬고 있는 현재의 시간에 지상에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로마제
국 한가운데 지금 임재하고 있는 부활한 예수와 함께 연대하여 억압의 구조
와 로마제국의 제국주의 체제와 전쟁 체제에 저항함으로써 그리고 반제국적
공동체를 추구함으로써 그러한 초월적인 대항 현실을 선취할 수 있다.
요한은 그러한 대항 현실을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윤리적 책무를 그
의 수신자들에게 요구하였다(16:15; 참조, 갈 3:27). 부활한 예수는 짐승과
대결하고 있는 기독교적 공동체와 연대하기 위해서 지금 오고 있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폭력의 역사를 단절시키기 위해서 지금 현재의
시간에 오고 있는 부활한 예수와 연대하여 폭력의 구조를 허물고, 폭력을 중
단시키는 일에 그리고 평화와 생명의 공간을 창조하는 일에 헌신하는 주체
로서의 새로운 삶의 여정을 통해서 유지된다. 그러므로 제국의 영이 전쟁을
부추기고 있고, 또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소명으로
받아드려야 할 윤리적 책무는 폭력의 역사의 견고한 흐름을 단절시키기 위
해서 지금 현재의 시간에 오고 있는 부활한 예수를 적극적으로 기다리는 것
이며, 그와의 연대를 통해서 로마의 제국주의 체제와 전쟁 체제를 와해시키
기 위해서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는 반제반전 투쟁의 주체가 되는 것이고, 그
리고 평화와 생명이 지배하는 반제국적 공동체 건설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전쟁을 지속적으로 일으키는 로마의 제국주의 체제와 전쟁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주체 윤리라고 불릴 수 있다. 요한의 주체 윤리의 목표는 어
떤 정치적, 경제적 체제가 아니라, 반제국적 대항 공동체이다.38) 그의 주체
윤리는 오늘날 분단된 한반도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실천을 위해
서도 매우 타당성이 있다.
오늘의 시대상황은 요한계시록의 저자의 시대상황과 비슷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서 있는 위치는 역시 여섯째 대접과 일곱째 대접 사이의 현
재적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제국은 고대의 로마제국 보다 더 폭력적
이다. 오늘의 제국은 절대적인 시장의 제국이다. 시장의 제국에서 전쟁은 중
요한 산업이 되고 있다. 거대한 자본주의 기업들과 군사 체제가 결합된 군산
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의 이익을 대변하는 미국 정부가 적대국
들을 악마화39) 하는 것은 전쟁과 군사기지 확보와 군수산업을 정당화하기 위
한 구실일 수 있다. 이와 정반대로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전쟁을 부추기는 제
국의 영을 악마의 영이라고 불렀다(16:14). 고대의 슈퍼파워인 로마제국이 “로
마의 평화”(Pax Romana)라는 공식적 선전을 통해서 로마의 지배와 전쟁을 정
당화하였듯이, 오늘의 제국은 “미국의 평화”(Pax Americana)라는 이름으로 전
쟁을 정당화하곤 한다. 예컨대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Lyndon Johnson)은 미
국이 1965년에 좌익 세력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도미니카 공화국을 군사적으
로 점령한 것을 평화를 위한 행위라고 다음과 같이 정당화하였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땅으로 군대를 보냈다. 하지만, 군대가 더는 필요
하지 않을 때에는 항상 돌아오곤 하였다. 이것은 미합중국의 목적이 자유를 억압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유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평화를 깨는 것이 아
니라 더욱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고, 땅을 불모로 잡는 것이 아니라 땅의 생명을
살리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 달 전에 나는 도미니카 공화국에 우리의 해군을
파병할 임무를 맡았다. 나는 같은 목적으로 그들을 보냈다.40)
남한에는 아직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41) 지금 이 순간에도 남한의
영토와 영해에서는 대량 살상 무기를 가진 한미합동 전쟁 연습이 계속되고
있다.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한 북한은 최근에 헌법 전문에 핵보유국
을 명시하였다.42) 이로 인해서 남한 정부는 군비증강을 위해서 비싼 미국
무기를 사는데 더욱더 많은 돈을 소모하도록 부추겨질 수도 있다.43) 그것은
한반도의 분단이 계속되는 것을 뜻하고, 통일이 기약 없이 미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과 전쟁 위협은 더 위력적인 신무기의 힘으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쟁 체제의 변화와 소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비폭
력적인 반제반전 투쟁의 힘과 용서와 화해의 힘을 통해서 정전협정44)을 대

체하는 미국과 북한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조속히 성사시켜야만 한다. 나아
가서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모든 나라들이 다른 나라들을 공격하거나 전쟁
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와 군대를 감축하고, 비군사적 방식의 방어를 수
립하는 국제적인 협약을 맺을 수 있도록 우리는 세계교회와 함께 전쟁 체제
가 인류의 적이라는 사실을 부단히 외처야 할 것이다. 전쟁은 상대편을 모두
적으로 규정하고 죽인다. 천상적 예수는 그것을 막기 위해서 전쟁 체제를 소
멸시켰다(19:20; 참조, 엡 6:12). 전쟁 체제가 우리의 적이다. 전쟁에 징집된
아들을 위한 무력한 어머니의 기도는 오로지 전쟁에서 아들이 죽지 않는 것
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1950년 10월에 평양을 진격하였을 때 평양 우체
국에서 미처 배달되지 못한 많은 편지들을 노획하였는데, 그 편지들 중의 하
나는 아들인 인민군 분대장 한희송에게 보내는 함경남도 신흥군 영고 면에
살고 있던 어머니 윤고분 씨의 애절한 편지이다:
拜啓(배계)
우수수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밤에 기러기 훨훨 날아가는 애상의 가을에 집에서
는 모두 다 안녕하니 절대로 근심 말아라. 그리고 손녀 행자는 집에서 아무 사고
없이 매일 무럭무럭 자라고 집에서 뛰어놀고 있으니 집에 대하여 근심하지 말고
너의 몸과 너의 건강만 부디부디 부탁한다. 집에서 너의 편지조차 없어서 속이
타던 차에 요행 편지를 받아보니 기쁘기 측량없다. 종종 집에 소식을 전하여다무
나. 그리고 희운이 공습지역에 떨어져 있다. 그러면 할 말은 태산 같으나 후일에
하기로 하고 마지막 부탁은 너의 몸 건강하기만을 모친은 매일 기도만 하겠으니
안녕히 있어라. 9월 10일 부침.45)
교회는 폭력의 역사를 단절시키고 평화와 생명이 지배하는 반제국적 공
동체를 건설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목적에 순종해서 부활한 예수와 함께 연
대하여 한반도의 분단 시대를 끝내고, 전쟁 체제와 억압의 구조를 변화시키
고, 그리고 빈곤화와 생태계의 파괴를 촉진시키는 시장의 제국에 저항하는

전위가 되어야 하며, 전쟁과 전쟁 위협과 빈곤과 여러 형태의 폭력에 짓눌려
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자유와 품위를 누리면서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후원하는 평화와 생명의 공간이 되어야만 한다. 교회의 구성원이 된
다는 것은 국가와 국적을 초월하여 모든 약자들을 대신해서 말하고 행동하
고 연대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용서와 화해의 공동체 건설에 헌신하는 것
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폭력의 역사의 견고한 흐름의 한 단면
인 분단시대의 지속을 단절시키기 위해서 전쟁 연습이 아니라, 통일 연습을
해야만 한다. 통일 연습의 구체적인 실례는 이산가족 상봉의 정례화, 금강산
관광의 재개,46) 조건 없는 식량 지원, 각계 계층의 민간인 교류와 경제적 협
력 사업의 활성화, 비무장지대의 평화생태공원화, 그리고 평화협정 체결이라
고 할 수 있다.
정의의 하느님은 폭력의 역사의 흐름을 반드시 단절시키고 악인들을 심
판할 것이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전쟁과 폭력의 희생자들이 품었던 희망이
고, 또한 오늘날 억압의 구조와 전쟁 체제에 짓눌려 있는 약자들과 가난한
자들이 품고 있는 희망이다. 일곱 대접들과 아마겟돈 전쟁 환상에 나타나는
진정한 평화는 전쟁이 잠정적으로 중단된 상태가 아니라, 전쟁이 더 이상 발
생할 수 없도록 제국주의 체제와 전쟁 체제가 완전히 소멸되고, 폭력에 의해
서 희생된 죽은 자들이 신원되고, 약자들의 빼앗긴 인권과 권리와 주체성이
회복되고, 그리고 형제자매적인 사랑과 연대의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현재의 시간에 오고 있는 부활한 예수와의 연대투쟁을 요구하는
요한계시록의 주체 윤리의 실천을 통해서 억압의 구조와 전쟁 체제를 종식
시키고, 자유와 평화와 생명의 공간을 창조하고, 용서와 화해의 공동체를 건
설하고, 한반도의 자주적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 오늘의 남녀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이다.

▪주제어(Keywords)
일곱 재앙들, 아마겟돈, 반제국주의, 전쟁 반대, 평화
(Seven Bowls, Armageddon, Anti-imperialism, Anti-war, Peace)

Armageddon War as Protest against
Imperialism and War and as Wish for Peace:
Juche Ethics of the Apocalypse of John
Byung-Hak Lee, Dr. theol.
Professor, Department of Theology
Hanshin University


This paper interprets the seven plagues which appear in the vision
of seven bowls from the perspective of the victims. The author of the
Apocalypse of John claims that the history of violence will not go on like
now continually, but will come to an end by the judgment of God. The
climax of the seven plagues is the destroy of the great Babylon. That
means not only the elimination of the structure of oppression of the
Roman Empire, but also the liberation of its victims.
This paper also deals with the text of Armageddon war which is situated
between the sixth plague and the seventh plague. John and his contemporary
readers stand in the present time between these two plagues.
It means that John situated intentionally the Armageddon war as the last
war in this present time of his days. Therefore, the text of Armageddon
war should not be understood as a prophecy which will take place in
the future. Rather it should be understood in terms of the yearning for
the destroy of the systems of Roman imperialism and war in the days of
John. His ethical imperative to overcome the Roman imperialism and war
system is very relevant to us korean Christians living in the divided
Korean peninsula.